자식이 내인생?-2
96년 여름, 숙영과 남편 그리고 3명의 아들들이 히드로 공항에 도착했다. 흥분과 두려움을 감추지 못하면서 산더미같은 짐꾸러미 옆에서 숙영과 남편의 걱정어린 휘둥그레한 눈들이 이리저리 재빠르게 움직인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마치 신기한 원더랜드에 떨어진 것 처럼 지나가는 사람들과 주변을 쳐다 보느라 정신이 나간 것 같다.12시간의 비행시간에 지치기고 했고 앞으로 무엇이 그들 앞에 닥칠까에 대한 불확실감과 불분명함에 숙영은 하룻 사이에 몸 속의 수분이 다 빠져나간 것 같은 몰골로 변했다. 그러면서도 숙영의 머리 속에 콜롬부스가 신대륙에 첫 발을 디뎠을 때 기분이 어땠을까라는 우스운 질문이 떠올랐다. 커다란 자동 출구문을 나와 긴 인파의 환영객들을 지나서 더 이상 통로는 보이지 않아 그곳에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 속에 그냥 서 있었다. 30분이나 지난 것처럼 느껴졌으나 실제로는 5분밖에 지나지 않았다. 시커먼 천장위에 달린 시계를 보니 5시 27분이다. 여기가 대영제국이라는 영국의 공항인데 숙영은 내심 실망했다. 김포공항보다도 더러웠고 어두컴컴하고 사람들도 부자처럼 보이지 않았다. 태어나 처음으로 해외에 나온지라 비교는 할 수 없지만 그동안 영화에서 본 것에 비추어 보면 히드로 공항은 웬지 난민촌 같았다. 숙영은 속으로 민박집 주인이 나타나지 않기를 순간 간절히 원했다. 지금이라도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반가운건지 얄미운건지 민박집 주인이 '안녕하세요'라면 숙영과 남편 등뒤에서 환영의 손을 내밀었다.
집을 구할 때까지 숙영네 다섯 명은 민박집에 머무를 것이다. 뉴몰든이라는 곳으로 향하는 봉고차 안에서 민박집 주인은 쉬지않고 무언가를 말하였지만 숙영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차창 사이로 스쳐가는 작은 붉은 벽돌집들은 옛날 읽었던 동화 헨델과 그래텔을 떠올리게 했다. 이곳이 진짜 영국 런던인가 아니면 동화 속 나라인가 숙영은 슬며시 집게와 엄지 손가락으로 자신의 다른 손등을 아무도 눈치채지 않게 꼬집어 보았다. 사실인가 보다.
똑같은 붉은 벽돌집들이 양 줄로 늘어선 좁은 길을 구불구불 지나고 또 지나더니 어느덧 차가 멈췄다. 어쩜 집들이 모두 똑같을까? 어떻게 이곳에서 영국 사람들은 자신의 집을 쉽게 찾아 갈 수 있을까? 숙영은 커다란 집일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너무 작은 집이였다. 현관문인지 대문인지를 들어서니 다시 컴컴하고 좁은 공간을 지나 다시 문안으로 들어갔다. 거실인가 보다. 너무 작아 보인다. 숙영의 26평 아파트 거실보다도 답답하다. 가방들을 거실에 놓고 그 옆에 모두 줄서서 기다리니 어디선가 주인 아줌마가 나타나 반갑다고 한다. 그리곤 아줌마를 따라 숙영이네 다섯 식구가 머물 방을 찾아 이층으로 큰 짐보따리를 끌며 올라갔다.
'저녁은 7시 입니다. 짐 정리하시고 식당으로 내려 오세요' 아줌마가 문을 닫고 나간 후 숙영을 작은 침대에 몸을 던졌다. 설악산 어느 이름없는 민박집에 있는건지 런던인지 다시 혼란스러웠다. 창문 가득히 들어선 초록 나뭇잎과 파아란 하늘, 정막한 골목길은 숙영을 기쁘게 했다. 그러나 인형집같은 자그만한 방은 이유없이 숙영을 불편하게 했다.
남편은 15일 동안 집도 구하고 숙영과 아이들이 런던에서 정착하는 것을 도와주고 서울로 돌아갈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남편의 얼굴은 숙영과는 달랐다. 남편은 좀 더 흥분되어 있었고 평상시와는 다르게 말을 많이하고 있었다 또한 아이들과 곧 헤어져 살아야 한다는 사실 때문인지 아이들곁에서 한시도 떠나려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미래에 일어날 사실을 잘 인식하지 못해서인지 자상한 아빠가 그저 좋기만하고 마냥 행복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