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해외유학의 끝은?
쇼핑몰을 지나가는데 훤출하게 큰 키에 눈에 띄게 잘 생긴 동양 남자의 모습이
내 시선을 잡아 당겼다. 손님들과 허탈하게 웃어가며 흥정을 이끌어가는 장사 솜씨가
보통은 아니였다. 달려가 "한국 사람이세요"라고 묻고 싶은 것 꾹 참고 스툴-수레위에서
물건을 파는곳을 지나쳐야 했다.
레딩축구팀에 설기현이 있어서인지 아니면 우리 집에서 가장 가까운 쇼핑몰이여서인지
나는 레딩 쇼핑센터에 간다.
며칠 후에 다시 그곳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커다란 아줌마가 서 있었다.
이 아줌마도 장사를 잘하는 것 같아 보였다. 지나가는 사람들과 인사도 할 정도로
이곳에 산지가 꽤 오래되었나 보다.
몇 번을 스쳐가던 어느 날, 쇼핑몰이 한산한 날이였다. 우연히 서로의 얼국이 마주치고
눈 인사를 나눈 후 자연스레 서로가 다가서게 되었다. 그리고 "혹시 한국 분이세요"라는
질문으로 시작한 인사는 곧 모든 가족 사항과 왜 이곳까지 와서 살고 있는 지에 대한
개인 역사까지 알게 되었다.
남편이 2년 전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지만 직업을 찾지 못하였고 더불어 별로 찾을 생각이
없어 보이기도 해 보였다 왜냐하면 나이가 벌써 50세를 앞두고 있는 처지라 직업 보다는
창업을 원하였나 보다.여하튼 한국에서 군대도 마치고 대학도 졸업한 후 넉넉한 시아버지 덕에
해외유학을 가게 되었다고 한다. 떠나기 전에 결혼도 하고 첫째와 둘째 아이도 낳고 갓난 아이들을
데리고 파리로 유학을 온 것이 1987년이란다.
3살,1살 아이들과 짐을 푼 곳은 파리 드골 공항에서 시내로 향하다보면 스타드움근처의 다소 허름한
호텔이였다. 남편의 짧은 불어로 앞으로 살 집을 되도록이면 짧은 시일 내에 구해야 한다.
그 동안만 이곳 호텔에서 머물 것이다. 미정은 남편과 과커플도 4년을 보냈지만 한 번도 직업을
가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미정은 시아버지의 권유로 남편과 곧 유학길에 오를 것이란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불어를 배우기는 하였지만 영 자신이 없다.
학부부터 공부하기로 하였지만서도 불어를 좀 더 공부하는 조건으로 입학이 허용되었다.
따라서 남편은 무척 바쁠 것이다. 여하튼 시내 파리 대학 근처에 작고 허름한 방 한 칸짜리
아파트를 세를 내었고 미정은 아이들을 돌보기에 여념이 없이 지내야 했다. 남편이 집에서
공부하고 있으면 아이들이 방해하지 않도록 두 아이들을 유모차에 끌고 아침 부터 저녁까지
온 시내를 걸어 다녔다. 싸 가져온 점심을 공원에서 먹고 야외 시장에서 저녁 장도 보고
날씨가 허락하는대로 미정은 아이들을 데리고 밖에서 시간을 보냈다. 프랑스는 외국학생이라도
학비가 거의 없어서 괜잖았지만 생활비는 시댁에서 보내 주셔서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었다.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을 모두 벼룩시장에서 구입하였고 음시만 단지 슈퍼에서 구입하였다.
1년이 지나 남편이 불어 시험을 통과했고 본격적으로 조경학 공부를 시작하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남편은 자신의 전공에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불어도 어렵다고 곧잘 하소연
하였고 조경학 박사를 끝마친다고 해도 한국에서 자신을 교수로 불러줄 학교도 확보된 것도
아니라면서 떠나올 때와는 다르게 점점 자신감을 잃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시댁 어른들께 말할 수가 없었다. 그 분들은 돈을 보내 주는만큼 기대를 키워가고 있었기에
확실하지도 않은 불안으로 그분들의 하늘을 떠다니는 기대에 바늘을 찔어 바람 빠지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결국 학업은 예상대로 좋지는 않았고 석사과정에서 남편이 가려고 하는 곳에서는
허락 통보가 안왔다. 이때 미정은 남편이 영국으로 옮기고 싶어하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돈이
문제였다. 영국에서는 외국학생이면 학비로 일년에 약 이천만원을 내야하고 거기에다 생활비까지
-어마어마한 돈이 필요하다. 남편은 아무 공부도 하지 않고 6개월 가량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매일 아빠가 아이들을 데리고 노는 것을 더이상 쳐다 볼 수가 었었다. 미정의 가족,
아니 온 시댁의 희망을 짊어지고 있는 남편인데 마치 모든 것을 손에서 놓은 사람처럼 텔러비전만
보고 아이들과 함께 놀고만 있다. 많은 생각 끝에 미정은 시댁에 고자질을 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영국에 가면 아르바이트를 할 수도 있을거라고 생활비를 조금이라도 거들 수 있을거라고 했다.
이번에는 며느리의 애틋한 마음씨에 시아버지께서 아들이 하고 싶은대로 하라는 허락을 하셨다.
그래서 미정이네 네 식구는 레딩대학교에서 남편의 석사과정을 시작하게 되어 런던 서쪽에 있는
레딩에 자리를 잡았다. 한 번 해 보았기 때문에 집 얻는 것은 쉬었다. 남편이 학생으로 있어서
아이들은 공립학교에 갈 수 있었다. 손자들을 유학 보내는 셈친다고 하시면서 남편 학비외에도
매달 라면, 마른 나물, 고추가루 등등을 한 박스 보내시면서 또 약간의 돈도 보내 주셨다.
미정은 보마우신 시부모님의 마음에 감동받고 그저 남편이 잘 적응하고 좋은 결과 있기만을
기도했다. 미정은 아이들이 학교에 가면 아침부터 영어 배우러 다니고 오후에는 맥도널드에서
아르바이트도 했다. 남편도 시간을 내어 학교에서 알선해 주는 일은 모든지 했다. 또한 저녁에
중국집 배달 아르바이트도 했고 술집-펍-에서도 밤 늦게까지 일하기도 했다. 어느덧 남편은
힘든 박사과정을 마치고 학위를 받았다.